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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몽골군을 물리친 베트남의 빛나는 승리: 세 차례의 격퇴 신화, 그 원인, 과정, 결과 분석

by jasonkang 2025.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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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몽골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서론: 불패 신화 몽골, 베트남에서 무너지다

13세기는 그야말로 몽골 제국의 시대였습니다. 칭기즈칸의 등장 이후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하며 수많은 국가와 민족을 정복했습니다. 동유럽에서부터 중동,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무릎 꿇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였으며, '불패의 신화'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몽골 제국의 무패 행진에 제동을 건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동남아시아의 베트남(당시 대월국 쩐 왕조)입니다. 베트남은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대규모 침공을 모두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국가의 독립을 지켜냈습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작은 나라가 강대한 제국에 맞서 싸워 이긴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베트남이 어떻게 강력한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는지, 그 침략의 발발 원인부터 양상, 진행 과정, 그리고 최종적인 결말과 역사적 의의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목차

  1. 시대적 배경: 대몽골 제국의 팽창과 쩐 왕조의 대월(Đại Việt)
  2. 제1차 침공 (1257-1258년): 첫 충돌과 예고된 저항
    • 침공 원인과 초기 전개: 남송 공략의 발판 마련
    • 쩐 왕조의 대응과 결과: 쩐 투 도(Trần Thủ Độ)의 결사항전 의지
  3. 제2차 침공 (1284-1285년): 최대 위기와 민족 영웅의 등장
    • 쿠빌라이 칸의 야심과 대규모 침공: 참파 원정 실패와 보복
    •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의 활약과 '원야전술(Vườn không nhà trống)'
    • 주요 전투(동보두, 함뜨, 반키엡)와 몽골군의 퇴각
  4. 제3차 침공 (1287-1288년): 백등강의 기적, 몽골 함대를 수장시키다
    • 해상 루트를 통한 재침공과 보급 문제
    • 백등강 전투(Trận Bạch Đằng): 결정적 승리와 쩐흥다오의 지략
    • 침공의 종결과 몽골의 대월 정복 포기
  5. 베트남 승리의 요인 분석
    • 탁월한 지도력과 군사 전략: 쩐흥다오를 중심으로
    • '거국일치(擧國一致)'의 민족적 단결: 지엔홍 회의(Hội nghị Diên Hồng) 정신
    • 지리적 이점과 기후 활용: 덥고 습한 기후와 험준한 지형
    • 유연한 전술: 유격전과 청야전술의 효과적 사용
  6. 몽골 침공 격퇴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 국가 독립 수호와 민족적 자긍심 고취
    • 동남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
    • 쩐 왕조의 안정과 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결론: 불굴의 민족혼,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부심


1. 시대적 배경: 대몽골 제국의 팽창과 쩐 왕조의 대월(Đại Việt)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통일된 몽골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세계 정복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이어받아 동쪽으로는 고려와 남송, 서쪽으로는 러시아와 동유럽, 남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인도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대몽골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특히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고 중국 대륙 전체를 장악하려 하면서, 남송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쩐(Trần) 왕조(1225-1400년)가 다스리는 대월국(Đại Việt)이었습니다. 쩐 왕조는 리 왕조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아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하고 있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농업 생산력 증대에도 힘썼습니다. 또한, 중국과의 오랜 관계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나름의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몽골의 팽창은 이러한 대월에게도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 제1차 침공 (1257-1258년): 첫 충돌과 예고된 저항

  • 2.1. 침공 원인과 초기 전개: 남송 공략의 발판 마련 몽골의 제1차 대월 침공은 남송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몽골은 남송의 배후를 공격하고, 대월을 통해 남송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1257년, 쿠빌라이 칸의 동생인 우리양카다이(Uriyangkhadai)가 이끄는 몽골군은 대리국(현재의 윈난성 일대)을 정복한 후 대월로 진격해 왔습니다. 당시 몽골군은 약 3만 명으로 추정되며, 기병 중심의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했습니다.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국경을 넘어 수도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까지 위협했습니다.
  • 2.2. 쩐 왕조의 대응과 결과: 쩐 투 도(Trần Thủ Độ)의 결사항전 의지 갑작스러운 몽골군의 침공에 쩐 왕조는 초기 혼란을 겪었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태사(太師) 쩐 투 도의 강력한 결사항전 의지 아래 뭉쳤습니다. 쩐 성종(Trần Thái Tông)은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수도 탕롱을 비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의 초기 형태를 구사했습니다. 몽골군은 빈 수도를 점령했지만, 식량 부족과 덥고 습한 기후, 그리고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유격전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약 9일 만에 탕롱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베트남군의 추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1차 침공은 몽골에게는 정찰전의 성격도 있었지만, 대월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제2차 침공 (1284-1285년): 최대 위기와 민족 영웅의 등장

  • 3.1. 쿠빌라이 칸의 야심과 대규모 침공: 참파 원정 실패와 보복 제1차 침공 이후 약 27년이 지난 1284년, 몽골은 다시 대월을 침공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이 직접 명령한 대규모 원정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월 남쪽에 위치한 참파(Champa) 왕국 원정을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대월이 거절했기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동남아시아 전체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조공 관계 강요가 주 목적이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진남왕 토곤(Toghon)이 이끄는 몽골군은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공격해 왔으며, 그 규모는 약 5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대월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 3.2.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의 활약과 '원야전술(Vườn không nhà trống)'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베트남 민족의 영웅 쩐흥다오(본명 쩐꾸옥뚜언, Trần Quốc Tuấn: 그의 이름은 오늘날 수많은 도시의 거리명에 사용되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마다 그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가 등장합니다. 그는 왕족이자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습니다. 쩐흥다오는 "화친을 주장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고, 항복을 주장하는 자는 온 가문을 멸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격문 '격장사(Hịch tướng sĩ)'를 통해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한 '원야전술'(베트남어: Vườn không nhà trống, 빈집 빈정원 전술, 청야전술과 유사)을 통해 몽골군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식량과 우물 등은 모두 없애거나 오염시켜 몽골군의 현지 보급을 차단했습니다.
  • 3.3. 주요 전투(동보두, 함뜨, 반키엡)와 몽골군의 퇴각 몽골군은 초반에 수적으로 우세하여 수도 탕롱을 다시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쩐흥다오가 이끄는 대월군은 동보두(Đông Bộ Đầu), 함뜨(Hàm Tử), 반키엡(Vạn Kiếp) 등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특히 덥고 습한 기후와 질병, 그리고 끊임없는 유격전은 몽골군을 극도로 괴롭혔습니다. 결국 토곤이 이끄는 몽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1285년 여름, 수치스러운 퇴각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4. 제3차 침공 (1287-1288년): 백등강의 기적, 몽골 함대를 수장시키다

  • 4.1. 해상 루트를 통한 재침공과 보급 문제 두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 칸은 대월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287년, 그는 다시 한번 토곤에게 대규모 군대를 주어 제3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해상을 통한 보급로 확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몽골군은 약 30만 명의 병력과 수백 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군이었습니다. 몽골군은 다시 한번 탕롱을 점령했지만, 여전히 보급 문제와 대월군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 4.2. 백등강 전투(Trận Bạch Đằng): 결정적 승리와 쩐흥다오의 지략 제3차 침공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전투는 1288년 백등강에서 벌어졌습니다. 쩐흥다오는 과거 응오꾸옌(Ngô Quyền)이 남한(南漢)의 군대를 격파했던 백등강의 지형과 조수간만의 차를 절묘하게 활용했습니다. 그는 강바닥에 미리 나무 말뚝을 박아두고, 몽골 함대를 유인했습니다. 썰물 때가 되어 수위가 낮아지자 몽골 함선들은 강바닥의 말뚝에 걸려 좌초되거나 파손되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매복해 있던 대월 수군과 육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여 몽골 함대를 괴멸시켰습니다. 이 백등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꼽히며, 쩐흥다오의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4.3. 침공의 종결과 몽골의 대월 정복 포기 백등강에서의 참패는 몽골군에게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토곤은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으며, 이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 칸은 격노했지만 더 이상 대월을 정복할 여력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로써 몽골의 세 차례에 걸친 대월 침공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몽골은 사실상 대월 정복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양국은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대월은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5. 베트남 승리의 요인 분석

  • 5.1. 탁월한 지도력과 군사 전략: 쩐흥다오를 중심으로 쩐흥다오를 비롯한 쩐 왕조 지도부의 뛰어난 리더십은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쩐흥다오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상황에 맞는 유연한 전략(청야전술, 유격전, 수전 등)을 구사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몽골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했습니다. 그의 전략적 안목과 결단력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5.2. '거국일치(擧國一致)'의 민족적 단결: 지엔홍 회의(Hội nghị Diên Hồng) 정신 몽골의 침공 앞에서 쩐 왕조는 왕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하나로 뭉쳤습니다. 특히 제2차 침공 직전 열린 지엔홍 회의에서 원로들은 한 목소리로 항전을 결의했는데, 이는 '나라 전체가 하나로 뭉친다'는 거국일치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민족적 단결은 몽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 5.3. 지리적 이점과 기후 활용: 덥고 습한 기후와 험준한 지형 베트남의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는 북방 초원지대 출신의 몽골군에게 매우 불리했습니다.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은 몽골군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또한, 복잡한 강과 늪지대, 험준한 산악 지형은 기병 중심의 몽골군이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대월군에게는 유격전을 펼치기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 5.4. 유연한 전술: 유격전과 청야전술의 효과적 사용 대월군은 정규군 간의 전면전보다는 유격전과 청야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수도를 비우고 적을 지치게 만든 후, 소규모 부대로 지속적인 타격을 가하는 방식은 몽골군을 괴롭혔습니다. 백등강 전투에서 보여준 지형과 자연조건을 활용한 수전 전략 또한 대월군의 유연한 전술 운용 능력을 보여줍니다.

6. 몽골 침공 격퇴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 6.1. 국가 독립 수호와 민족적 자긍심 고취 몽골의 침공을 세 차례나 격퇴한 것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를 통해 대월은 국가의 독립을 지켜냈으며, 베트남 민족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 6.2. 동남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 대월의 승리는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몽골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대월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이러한 팽창 정책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독자적인 역사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6.3. 쩐 왕조의 안정과 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몽골 침공 격퇴 이후 쩐 왕조는 국내외적으로 위상이 높아졌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쩐 왕조 시대의 문화, 예술, 학문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결론: 불굴의 민족혼,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부심

베트남은 외세의 침입과 점령(중국은 약 960년 동안 베트남을 점령하고 안남도호부를 운영했습니다) 등의 파란의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이후에도 프랑스의 지배등을 거쳤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점령, 그 이후에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이런 베트남의 역사를 읽다 보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가장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바로 오늘의 주제인 몽골 침입에 대한 베트남의 승리이야기일 것입니다. 베트남이 세 차례에 걸쳐 세계 최강 몽골 제국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역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섭니다. 이는 탁월한 지도자의 리더십, 전 국민적인 단결, 지혜로운 전략과 전술, 그리고 불굴의 민족혼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결과였습니다. 몽골을 물리친 경험은 베트남 민족의 DNA 깊숙이 각인되어, 이후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 중요한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쩐흥다오를 비롯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영감을 주고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도 약소국이 강대국에 맞서 싸워 승리한 빛나는 사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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