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베트남 선사 시대의 문을 열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강물들이 대부분 황토물로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흙탕물'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아주 미세한 흙 입자들로 말미암아, 일종의 준 콜로이드 상태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방콕을 여행하다 아동 그림 전시회를 참관한 적이 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강물을 황토색으로 표현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런 지형적 특징 외에 베트남의 해안선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완만한 돌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쪽은 주로 화강암이고 북쪽으로 가면 석회암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베트남의 지형이 대단히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심장부에 위치한 이런 베트남은 장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자랑합니다. 흔히 우리는 베트남의 역사를 왕조 시대나 근현대사의 격동기 중심으로 떠올리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 인류가 처음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구석기 시대부터 베트남 땅에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은 동남아시아 초기 인류의 생활상, 이동 경로, 그리고 기술 발전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며, 세계 인류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글에서는 베트남의 주요 구석기 유적인 안 케(An Khê), 누이 도(Núi Đọ), 그리고 후기 구석기시대의 선비(Sơn Vi) 문화를 중심으로, 까마득한 옛날 베트남 땅에서 살았던 인류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이 유적들은 단순한 돌조각이나 땅속의 흔적을 넘어, 수십만 년 전 인류가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했으며, 문명의 씨앗을 틔웠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타임캡슐입니다.
1. 안 케 (An Khê) 유적: 베트남 구석기 역사의 기념비적 발견
- 위치: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 자라이(Gia Lai) 성 안 케 시사(thịxã) 일대
- 추정 연대: 약 80만 년 전 (초기 구석기 시대)
- 주요 유물: 아슐리안형 주먹도끼(Bifaces/Hand axes), 찍개(Choppers), 긁개(Scrapers), 몸돌(Cores), 격지(Flakes) 등
베트남 구석기 연구에 있어 가장 주목받는 발견 중 하나는 바로 안 케 유적입니다. 2014년 베트남 고고학 연구소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소의 공동 연구팀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 및 연구가 시작된 이 유적은 동남아시아,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초기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안 케 유적의 가장 큰 의의는 약 80만 년 전이라는 연대 추정치와 함께, 아프리카와 유럽의 초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아슐리안(Acheulean) 형 석기가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양면 가공된 주먹도끼(Bifaces)의 발견은 기존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아슐리안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매우 미미했다는 '모비우스 라인(Movius Line)' 가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모비우스 라인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고고학자 할람 모비우스(Hallam Movius)가 제안한 가설로,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주로 아프리카, 서아시아, 유럽)과 찍개 중심의 문화권(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을 구분하는 가상의 선이었습니다. 안 케 유적의 발견은 이 경계가 생각보다 유연했거나, 동남아시아에도 독자적인 또는 전파된 아슐리안형 석기 제작 기술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안 케에서 발견된 석기들은 규암(Quartzite) 등의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크기가 크고 형태가 비교적 정형화된 주먹도끼, 그리고 투박하지만 효과적인 찍개와 긁개 등 다양한 종류를 포함합니다. 이는 당시 인류(호모 에렉투스 단계로 추정)가 주변 환경에서 석재를 선택하고, 목적에 맞게 도구를 제작하여 사냥, 채집, 가공 등 다양한 활동에 활용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주먹도끼는 다용도 도구로서, 땅을 파거나 동물을 해체하고 식물을 가공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 케 유적의 발견은 베트남이 초기 인류의 중요한 활동 무대였음을 증명하며,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가 어떤 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각 지역에서 어떤 기술적 적응을 이루어냈는지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2. 누이 도 (Núi Đọ) 유적: 탄호아 지역의 오랜 구석기 흔적
- 위치: 베트남 북중부 탄호아(Thanh Hóa) 성 투에 이호아(Thiệu Hóa) 현
- 추정 연대: 약 40만 년 전 (초기 ~ 중기 구석기시대)
- 주요 유물: 찍개(Choppers), 긁개(Scrapers), 다면체 석기(Polyhedrons) 등
누이 도 유적은 1960년대 초반 베트남 고고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비교적 일찍부터 알려진 구석기 유적지입니다. 이곳은 현무암 언덕 지형으로, 석기 제작에 적합한 암석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누이 도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들은 안 케 유적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처럼 정교하게 가공된 형태는 아니지만, 크기가 크고 투박한 찍개와 긁개 등이 주를 이룹니다. 이는 당시 인류가 주변의 현무암 자갈돌 등을 이용하여 필요한 도구를 즉석에서 제작하여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강가의 자갈돌이나 암석 덩어리의 한쪽 면 또는 양쪽 면을 때려 날카로운 날을 만든 찍개(Chopper)와 초핑툴(Chopping tool)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석기 제작 기술은 안 케 유적보다는 단순하지만, 여전히 초기 인류의 생존 전략과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누이 도 유적의 연대는 약 4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이는 안 케 유적보다는 후대이지만 여전히 베트남의 오래된 구석기시대를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누이 도의 석기 문화를 '누이 도 문화(Núi Đọ Culture)'로 명명하기도 하며, 이는 베트남 초기 구석기 시대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누이 도 유적은 베트남 북중부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인류가 어떻게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주며, 안 케 유적과 함께 베트남 초기 인류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3. 선비 (Sơn Vi) 문화: 후기 구석기에서 신석기시대로 가는 길목
- 위치: 베트남 북부 푸토(PhúThọ) 성 럼타오(Lâm Thao) 현 선비(Sơn Vi) 마을 최초 발견, 이후 북부 홍 강(Red River) 유역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
- 추정 연대: 약 23,000년 전 ~ 11,000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 ~ 중석기 시대 전환기)
- 주요 유물: 자갈돌 찍개(Cobble choppers), 종횡형 석기(Side-scrapers), 끝날 긁개(End-scrapers) 등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뗀석기
선비 문화는 베트남의 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 단계입니다. 안 케나 누이 도 유적처럼 수십만 년 전의 유적은 아니지만,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베트남 지역에 정착하여 환경에 적응하며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을 담고 있습니다.
선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주로 강가의 자갈돌(Cobble)을 이용하여 석기를 제작했다는 점입니다. 석기의 크기는 이전 시대에 비해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형태도 규격화되거나 정교하게 다듬기보다는 자갈돌 본래의 형태를 최대한 활용하여 최소한의 타격으로 날을 세운 도구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자갈돌의 한쪽 끝을 때려 날을 만든 찍개류와 측면을 가공한 긁개류 등이 있습니다. 이는 석기 제작 기술이 퇴보했다기보다는, 당시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맞춰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도구 제작 전략을 택했음을 시사할 수 있습니다.
선비 문화는 시간적으로 이후에 나타나는 호아빈 문화(Hòa Bình Culture) 및 박선 문화(Bắc Sơn Culture)와 같은 베트남의 중석기 및 신석기시대 문화와 기술적, 문화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로 여겨집니다. 즉, 선비 문화는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점차 정착 생활과 농경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비 문화 유적은 베트남 북부의 여러 동굴, 바위그늘, 강가 등 다양한 환경에서 발견되며, 이는 당시 인류가 다양한 지형과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 영역을 넓혀갔음을 보여줍니다.
4. 베트남 구석기 연구의 의의와 미래
베트남에서 발견된 안 케, 누이 도, 선비 문화 등의 구석기 유적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고고학적,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 초기 인류 확산 경로 연구: 특히 8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안 케유적은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초기 인류(호모 에렉투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 깊숙이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기술적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 동남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다양성 증명: 아슐리안형 석기(안 케)부터 단순한 찍개 중심의 석기(누이 도), 자갈돌 석기(선비 문화)까지 다양한 석기 기술의 존재는 동남아시아 구석기 문화가 기존의 통념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음을 보여줍니다.
- 인류의 환경 적응 능력: 수십만 년에 걸쳐 변화하는 자연환경 속에서 베트남의 구석기 인류가 어떻게 석기 기술을 발전시키고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며 생존해 왔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 후대 문화와의 연결성: 선비 문화는 이후 동남아시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호아빈, 박선 문화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며, 베트남 선사 시대 문화 발전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물론 베트남의 구석기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 측정, 발견된 인골 화석의 부족, 각 유적 간의 관계 규명 등 앞으로 밝혀내야 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발굴과 연구를 통해 베트남,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세계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결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다
베트남의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구석기 유적들은 단순히 오래된 돌멩이가 아니라, 수십만 년 전 이 땅 위에서 치열하게 살아갔던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입니다. 안 케이 정교한 주먹도끼에서부터 누이 도의 투박한 찍개, 선비 문화의 실용적인 자갈돌 석기에 이르기까지, 이 유물들은 인류가 어떻게 지혜와 기술을 발전시켜 환경에 적응하고 문명을 일구어왔는지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입니다.
베트남의 구석기시대 연구는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전체, 더 나아가 세계 인류사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발견을 통해 베트남의 선사 시대 역사가 더욱 풍성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이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베트남 여행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박물관 등에 전시된 이 오래된 유물들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특별한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